2006년 : <AFEW>

thwvy 2017.11.29 19:30 read.236

2006년 <AFEW> : 문화, 라이프스타일 기획/취재 

일부 지면 /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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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passion of generation_와인은 예술, 와인을 만드는 이들의 열정도 예술 아니겠는가. 어퓨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와인명가 대표 여섯 명을 한데 엮었다.  

 

와인 전문가는 예견했다. ‘어쩌면 전 세계의 미래는 충돌과 갈등보다는 포도주 문명으로 하나가 될지 모른다’고. 와인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지고, 와인 생산량 또한 늘어나고 있긴 하다. 일본은 유럽 와인 비법을 배우기 위해 위장 취업해 밭뙈기를 사들이고 있는데, 그것이 프랑스마저 긴장할 만큼이라는 말도 있다. 와인 산업의 분홍빛 미래를 암시하는 일례다. 하지만 이건 향후 와인 시장이 희망적이라는 선에서 일단락하자. 

샤토급만 7천 개인 프랑스는 한해 2백억 달러가량의 와인을 마시고 있다. 이것을 한 사람당 환산해 보면 25병 정도다. 단지 와인을 많이 마신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는 그들의 문화. 국내의 와인 열풍도 <신의 물방울>이란 만화가 유행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와인을 즐기는 것에서 얕은 애호가로 접근하기까지 몇 가지 알아야 할 것, 알고 싶은 것들은 무엇일까 접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와인 명가 여섯 곳을 인터뷰했다. 그들은 몇 대를 이어오며 와인을 생산하는 가문에서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이들이다. 인터뷰를 통해 느낀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와인을 예술의 경지로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자들마저 떼루아라고 하고 싶을 만큼 그들 자체가 너무도 소박하고 성실한 장인이자 농부였다는 것. ‘와인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 고급화되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와인 명가를 선정한 기준은 우수한 가문, 좋은 와인을 생산한 곳을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와인과 그렇지 않은 와인을 혹은 오래된 정도에 따라 구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 와인은 어느 것이 더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랑스 와인과 이태리 와인은 다르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에 유념했다.

 

1) Antinori Alessia Antinori

안티노리는 700년간 26대를 이어왔고 현재 이태리에서 프리미엄 포도원을 가장 많이 소유환 와인 생산자이자 이태리 와인의 품질을 전 세계에 알린 와인명가다.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은 20세기 후반 세계 시장에서 이태리 와인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현재는 그의 딸 알레시아 안티노리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녀는 도시 피렌체 시내의 심장부에 위치한 1500년대에 지어진 아담하고 아름다운 저택 팔라조 안티노리에서 태어나 1996년부터 포도 수확 및 생산에 참여했다(그녀를 포함해 피에로 안티노리 후작의 세 자매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어릴 때, 그러니까 아마도 18살이나 19살 생일로 기억해요. 가까운 친구들에게 감사의 카드를 돌리면서 썼던 말이 이랬어요. ‘좋지 않은 와인을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비록 어릴 때 했던 말이지만 지금까지 그 생각은 변함 없어요.” 안티노리가에 있어 와인 생산은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가문의 누군가가 혹은 자손 모두가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했고, 그 열정과 가치를 독려하고 사랑해 왔다. 2000년에는 안티노리의 와인 ‘솔라이아’가 이태리 와인 최초로 미국 와인 전문지인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100대 와인 중 1위에 선정된 것도 가문이 함께 누렸을 기쁨이다. “안티노리는 단순히 긴 역사를 이어온 것이 아니라 전통과 혁신이 조화를 이룬 장인 정신이 깃든 와인을 만들어요. 토종 품종에 대한 애정과 연구, 특히 해외 품종에 대한 열린 자세를 갖고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아요. 작황이 좋지 않은 해에는 고급 와인은 생산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고요. 좋은 포도원에서 재배한 포도가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걸 간과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지요.” 안티노리는 뛰어난 포도원 확보를 위해 매년 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사업으로 보면 와인 생산도 치열한 경쟁과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기를 건너 사업을 대물림할 수 있는 저력은 뭘까. 그녀가 말하기로는, 와인이 좋은 성과를 거두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볼 때 사업적 ‘성취감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한다.

 

2) Maison Louis Latour Louis Fabrice Latour

부르고뉴에서 2백 년 이상, 10대가 동참했다. 그러니 루이 라투르는 아마도 부르고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가족경영회사가 맞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 품종의 포도만으로 고집스럽게 맛을 지켜나가는 부르고뉴를 대표한다. 또한 가장 존경받는 네고시앙(소규모 포도농가와 계약을 맺고 이들이 생산한 포도나 주정을 사들여 블렌딩, 숙성, 병입 등의 단계를 거쳐 와인을 만드는 업체를 말한다)이며 그 규모로 따지자면 이 지역에서 가장 넓은, 50헥타르의 그랑크뤼 포도원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건 루이 라투르가 소유의 포도원에서 재배된 포도는 알록스 꼬르통 내에 있는 샤또 꼬통 그랑쉐 양조장에서 생산되는데 그곳은 프랑스 최초로 지어진 ‘양조장 목적’의 양조장이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오래된 스틸 시설과 레일웨이, 엘리베이터를 시설을 사용 하고 있으며 중력을 사용해 와인 즙을 내고 있다. 그곳에서 루이 라투르는 꼬르똥 샤를마뉴 그랑크뤼를 탄생시키곤 했다. 샤를마뉴란 이름은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에서 유리하고 특급 화이트 와인이 그렇듯 이야기를 갖고 있다. “어느 날 이곳을 방문한 샤를마뉴 대제가 그곳에 들러 식사를 했고, 그때 적포도주가 그의 수염에 묻어 붉은 얼룩이 졌습니다. 그는 화가 났고 앞으로 이곳에는 화이트 와인만 생산할 것을 지시했지요.” 최고의 화이트 와인으로 꼽히는 이 와인은 2003년 The Wine Advocate에서 동급 네고시앙들과 견주었고 그 중 최고의 점수를 획득했다. 그리고 2003년 Decanter of march에서는 별 다섯 개를 받아냈다. 

루이 파브리스 라투르는 전통에 기반을 둔 혁신을 강조한다. 1985년부터 그는 화학비료의 사용을 자제하고 병충해를 예방하는데 천적을 이용하는데 이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매우 혁신적인 농사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라투르 가는 오래 전부터 변화를 시도해왔고 덕분에 고품질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유럽과 일본황실에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3) Jean marie bourgeois

장 마리 부르주아는 포도밭에 약을 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가 14살, 크고 무거운 장비를 어깨에 둘러메기엔 버거운 나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포도나무에 대한 특별한 느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포도나무를 돌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포도나무는 마치 예쁜 아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도요.” 그 다음으로 그는 와인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축제 같은 추수 기간에 ‘레 삘롱(불어로 절구질)’이라고 하는, 포도를 따서 통에 넣고 발로 밟는 일과 화이트 와인을 나무통에서 발효시키는 일을 했다. 와인은 일단 발효가 시작되면 변화를 체크하기 위해 매일 시음해야 하기에, 단순한 포도즙이 ‘신의 음료’로 변해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또 와인을 만드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토양에서 재배된 포도를 가지고 하나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만들면 또 하나의 와인 안에서 그 토양의 특징이 모두 표현된다 것을 신비한 것 말고 달리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장 마리 부르주아는 이를 ‘동화 같았다’고 표현한다. 첫 번째 싹이 나오는 일, 변화무쌍한 날씨, 와인이 만들어져 첫 번째 시음을 할 때의 설렘, 새롭게 만들어진 와인이 주는 즐거움까지 어느 과정 하나 각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와인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요리사를 꿈꾸기도 했다. 지금도 휴가를 떠나 요리하는 사람은 장 마리 부르주아다 “저는 와인을 만드는 일과 요리를 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와인을 만들 때는 요리를 만들고 다른 이에게 맛을 보게 하는 것만큼이나 엄격해야 하거든요.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와인을 좋아해서 덕분에 미식에도 눈을 떴으니까요.” 그는 진정 운이 좋은 사람이 맞다. 모두가 꿈꾸는 역사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의 와인에는 생-에티엔(Saint-Etienne)이 있는데 그것은 435살 된, 벼락 맞은 오크로 만든 발효통에서 만들어진다. 오래된 오크를 놓고 프랑스인과 미국인, 일본인과 겨뤄야 했다고 한다. 이런 특별한 역사를 가지면서 또 장 마리 부르쥬아의 와인도 특별해지는 것이다. 끌로 앙리의 소비뇽 블랑은 어땠는가. 그것은 모두가 레스토랑에서 꼭 맛보고 싶어하는 와인으로 ‘Buyer's Guide to New Zealand Wines 2005’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받은 최고의 와인이다. 

 

4) GAJA Angelo Gaja

가야 와이너리는 1859년 피에몬테에 설립됐다. 거슬러가도 한참인 1959년이 100주년이었고 그날은 안젤로 가야에게 가장 특별한 하루로 기억된다. “당시 마을 면장이었던 나의 아버지 지오바니 가야(Giovani Gaja)는 바르바레스코 마을 사람들에게 하루 동안 와인 셀러를 방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와이너리의 셀러는 매우 신성하고 비밀스런 공간으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니까요. 그날 마을 주민들은 셀러에 들어가서 원하는 만큼 와인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른 아이를 포함해 모두 763명의 주민이 와인 셀러에 들어가 즐기는 모습을.” 안젤로 가야는 순탄하게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할머니 끌로틸드 레이(Clotilde Rey)는 그에게 남들과 다른 독특한 와인을 만들면서 농사일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줬고 그의 아버지는 와인에 관련된 모든 지식과 경험을 물려주었다(훗날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신보다 더 나은 와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30년을 함께 일한 그의 아내는 그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줬고 딸 가이아(Gaia)는 어느덧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되었다. 안젤로 가야는 확신에 차 얘기할 수 있는 것다.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단 한번도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라고. 그는 장인임을 자칭하며 더 나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 차 하루를 보낸다. 열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하면서 만일 포도가 ‘가야 수준’에 미달된다고 생각되면 와인 생산을 포기해버린다. 그는 미달된 포도는 벌크로 다른 병입자에게 헐값에 파는데, 이건 굉장한 손실이다. 일부 와이너리들은 ‘세컨드’ 혹은 ‘써드 라벨’로 와인을 만들어 판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이유로 안젤로 가야는 2002년에는 피에몬테 전체 와인의 생산을, 2003년에는 Gaia&Rey의 생산을 포기했던 전력이 있다. 그러니 그가 와인을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들리지 않는다. 안젤로 가야는 ‘훌륭한 와인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빅터 휴고의 명언에 깊이 공감한다. “신은 인간에게 물을 주었고,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5) Laroche Michel Laroche 

어렸을 때부터 와인 셀러 안에서 뛰어다니던 미쉘 라로쉬는 어디서 태어났냐는 질문에 ‘오크통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업을 이어가야 한다는 기분은 어떨까. “만약 나에게 다른 사업에 관한 선택권이 있었다면 건축가가 됐을 거예요. 나는 창조적인 일에 매력을 느꼈고 건축가를 열망했었어요.” 하지만 미쉘 라로쉬는 지금 가업을 물려받아 5대 손으로서의 몫을 이어가고 있다. 가업을 잇는다는 것과 가족과 함께 비즈니스를 도모한다는 건 어려운 일, 그래서 미쉘 라로쉬는 기본적으로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한다. 일이나 사적인 경우 다툼이 생겼을 때 갈등을 극복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이상의 ‘묘’가 필요하다. 비즈니스 선배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융화하기에도 어려운 것이 가업의 어려움이다.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부모님 세대와의 차이 때문에 여러 생각과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도 나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별도의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고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의 성공적인 사업 성과를 통해 모든 걸 증명했어요. 그때부터 아버지와의 어려운 관계를 극복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뒤로는 아버지와 나의 사업을 ‘도멘 라로쉬’라는 이름으로 통합했지요.” 라로쉬는 프랑스 보르고뉴 지방의 샤블리에서 명성을 얻고 남프랑스 랑그독, 칠레, 남아공 등지에서도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코카콜라도 원액이 같을 뿐, 나라별 물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맛이 다른데 와인은 또 어떻겠는가. 그래서 미쉘 라로쉬는 남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개개의 포도품종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것이다. 샤블리에서 샤도네를, 아르헨티나에서 말벡을, 호주에서 최고의 시라를. 하지만 그간 와인에 대한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한가지다. “와인의 형식에, 지식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그저 그 아름다움을 느끼면 될 뿐입니다. 예술 같은 와인을 그저 기쁜 마음으로 좋은 사람들과 즐겨주세요.” 

 

6) Chateau Mouton Baroness Philippine de Rothschild 

나의 어머니는 1945년, 2차 대전 중 사망했다. 내가 열 살 때 헤어졌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나를 돌보는 아버지(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와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다)의 사랑은 각별했는데, 심지어 나를 위해 아버지는 <은빛날개 주전자>라는 동화책을 쓰기도 했다. 아버지는 예술을 사랑했으며 유명한 배우나 예술가와의 교분이 두터웠고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들과 가까이 했던 영향으로 나는 파리 국립 예술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연극배우가 됐는데, 브리지트 바르도와 함께 영화를 찍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활동은 4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이 그 즈음, 1970년대 후반 아버지가 병약해졌을 때다. 나는 와인과 예술을 접목하고 싶었고 1981년에는 샤또 무똥의 라벨 전시회를 시도하며 1988년 필립 남작이 타계한 뒤 본격적으로 바롱 필립사의 사주가 되었다. 나는 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모두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다. 만족을 모르는, 완벽주의자로 일을 하고 싶었고 결국 연간 생산량 1천3백만 케이스에서 2백만 케이스로 생산량을 늘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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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 나의 연못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나에게 지베르니는 너무도 멋진 곳입니다" 1883 모네가 뒤레에게 보낸 편지  구절이다아름다운 <수련연작을 탄생시킨 지베르니모네의 낙원. 

 

파리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강변 마을인 지베르니는 모네가 그의 말년을 보낸 곳이다파리  라자르 역에서 베르농으로그리고 그곳에서 지베르니로 가는 버스를 타면 생전에 모네가 머물던 집을 찾아갈  있다모네가 그림을 그리던 아틀리에에 기념품 판매소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모네가 살던 그때와 달라진 것은 없다여전히 그의 정원에는 해마다 아이리스와 양귀비꽃이연못에는 수련이 꽃을 피우고 있다모네는 1881년부터 머물렀던 쁘와시를 떠나 그의 연인과  아들을 데리고 지베르니에  줄곧 화단과 연못에 공을 들였다그리고 지베르니 정원을 두고 ‘지상의 낙원이라 불렀으며단지 자랑하기 위해 많은 지인들을 초대하곤 했다형편이 좋아진 무렵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수련 씨앗을 연못에 뿌린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와 비교해보곤 작은 일본식 다리를 놓기도 했다모네는 지베르니를 매우 특별한 빛을 담은 축복의 공간으로 생각했다그리고 그의 낙원을 거니는 것을 좋아했다후세에 그에게 ‘빛과 물의 화가라고 이름붙인 것처럼 태양의 이동에 따른 연못의 변화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팔레트인 무성한 꽃밭이 그에게는 보물이었다그래서 종종  곳에서 서너 시간을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 예사였다고 한다지금도 그의 정원에는 평일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그가 40여년을 지베르니 정원과 함께 했듯이, 30여년간 수련을 그렸듯이 그의 그림을 이해하고 싶다면 지베르니 정원에 들러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그리고 많은 관광객들이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그의 정원은 하루를 온통 쏟아 부어도 또다시 그리워지는 관광코스가 됐다특히나 정원에 꽃이  무렵 거닐다 보면 어딘가에서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네를 만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모네는 1840년에 식료품상 아들로 태어났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그래서 그가 보고 느끼는 산과 들이 그에게는 화실이자 캔버스가 되는 거였다센강 하구에 있는 항구도시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마을 명사의 캐리커처를 그려 호평을 받았고 풍경화가 E. 부댕을 만나 유화를 배우면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쉽게 얻은 것은 질색이다라던 말을 했던 것처럼 그는 생전에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눈과 느낌만을 신뢰했다 세잔도 그의 눈에 감탄한 모네의 특별한 눈은 자연이 변화하는 순간을 포착해냈고 그의 손은 화폭 위에서 빠른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려내곤 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한  100년이 지난 평론가 모리스 귀요가 지베르니를 찾아갔다그는 ‘입구 인근에는 간이역을 연결하는 작은 철로가 있고 르와르  길목으로 통하는 거대한 전나무가 자라는 침침한 오솔길이 있다입구에 들어서면 맵시는 없지만 단정한 과수와 채소가 자라는 정원이 있다그리고 빛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신비할  같지 않은 커다란 공간 트인 들판이 이어진다언덕이 있고 낮은 지평선에 버드나무와 포플러가 있다.’ 지극히 덤덤히 모네의 정원을 묘사한다모네는 단지 보편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하지만 빛을 잡아내는 모네의 눈은 집요하기까지 했다바다 위에 떨어지는 오렌지색 해돋이 짚더미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한 연못 위에 비치는 그림자와 석양을 포착해 예리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탁월한 화가였다그리고 1870년대부터는 자연으로부터영향 받은 인상을 같은 맥락의 소재나 주제로 이어지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이를테면 파리 생라자르역이나 건초더미루앙 대성당과 수련이 있다그는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묘사법을 버렸다그래서 그는 19세기 미술의 최대 혁명이라   있는 인상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남았다그리고 1874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인상해돋이> 인상주의를 탄생시킨 작품이 됐다. 

 

 

모네는  2천여 점의 유화 작품을 남겼다그리고 1883년에서 1926년까지 생의 절반가량을 머물렀던 지베르니에서 그려낸 <수련> 연작들은 2백여 점이다. <수련연작은 <루앙 대성당> <런던 국회의사당등에서 이어 인상주의 기법의 결정체다그리고 1989년을 시작으로  30여년 모네 예술의 전부이기도 하다초기에는 원근법에 따라 수련 연못에 비친 하늘과 자연의 빛과 색채가 변화하는 것을 인상주의 기법인 가벼운 터치의 병렬이었다그러다가 점차 단편화되고 원근법이 무시되면서 2차원적으로 변화했고 추상성을 띠게 됐다가장 추상적이었던 시기는 정확히 1 대전 전후에서 백내장 수술이 있던 1920년까지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무렵이다레오넬로 벤투리는 모네의 시각에서의 빛과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빛과 색채에서 아무도 못한 것을 그가 발견했다그리고  안에서 회화적 표현을 취득했다.” 모네는 1916년에 정치가 끌레망소의 덕택으로 오랑쥬리 미술관을 장식하는  벽화에 착수해 백내장 수술을 받아가며 대작 12점을 완성했다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참으로 어렵고 고된 일이다간혹 그림을 그리다 절망을 느낄 때가 있다하지만 나는 표현하는 것을  표현할 때까지는최소한 그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전에는 죽을 라야 죽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1926 세상을 떠났다 

 

 

공지 *2005~2017년 포트폴리오
14 2019년 : <ORDINARY>
13 2017년 : <매일경제> <MorningCalm>
12 2016년 : <매일경제> <뉴스제주>
11 2015년 : <Olive> <매일경제>
10 2014년 : <매일경제> <한살림>
9 2013년 : <매일경제>
8 2012년 : <아시아경제>
7 2011년 : <아시아경제>
6 2010년 : <THE GALLERIA>
5 2010년 : <THE GALLERIA>
4 2008-2009년 : <HAUTE> <THE GALLERIA>
3 2007년 : <AFEW>
> 2006년 : <AFEW>
1 2005년 : <FEA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