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 <THE GALLERIA>

thwvy 2017.11.29 18:34 read.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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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LLERIA>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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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유지해야 할 태도

한창훈 작가는 소설가를 결심한 연유에 대해 "내가 세상에 대해 유지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여덟 시간, 그가 거문도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그의 책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와 같을 것이다.

 

아련하게 바다 내음이 나는 것도 같았다. 바닷가를 향해 1km쯤 못 미쳐 다가갈 때 맡아지는 정도의 내음이다. 한창훈 작가는 책에서 보던 사진처럼 키가 크고, 손이 두껍고, 제법 긴 흰 머리를 넘기고 나타났다. 그의 책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에서 본 적이 있는 군청색 가방을 메고서. 거문도는 먼 곳이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기차를 탄다면 대략 6시간이 소요된다. 거기서 거문도까지 다시 배를 타는데 2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 정확히 115km다. 기차와 배 시간이 까딱 어긋나기라도 하면 바로 1박 2일 코스가 된다. 마침 서울에 올 일이 있어 망정이지, 일이 몇 가지 겹치기 전에는 걸음 할 엄두가 나지 않을 거리다. 

그는 1963년 여수시 삼산면 거문도에서 태어났다. 책에 쓰여진 저자 소개대로라면 그는 음악실 디제이, 트럭운전사, 커피숍 주방장, 배의 선원, 건설현장 막 노동꾼, 포장마차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전업작가가 되었다. 이때는 거문도에서 생활하지는 않았다. 컨테이너선을 타고 부산에서 두바이, 홍콩에서 로테르담까지 두 번의 긴 항해를 하면서 근해의 답답함을 풀어보기도 했다. 지금은 거문도에서 원고를 쓰고, 이웃과 뒤섞이고, 낚시와 채집을 하며 지낸다. 그간 <바다가 아 름다운 이유> <가던 새 본다> <한창훈의 향연> <나는 여기가 좋다> <홍합> 등 많은 책을 썼다. 한겨레문학상을 받았고, 요산문학상, 대산창작기금 등의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누가 40 전에는 기구하다고 했다던데, 대체로 바쁘고 부지런하고 공사다망 했을지언정 결국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그의 삶이었던가 보다. 

그의 신간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원고지 12매 분량의 글을 신문에 연재하면서 시작되었다. 책은 그가 연재한 것에 살을 붙이고 30가지로 분류해 완성했다. 모두 그가 바다에 나가 배우고 먹고, 느낀 것들이다. “거문도에서 태어났지만 학창 시절은 뭍에서 보냈다. 사실 섬에서 나와 지낸 기간이 꽤 된다. 다시 거문도로 돌아온 건 4년 전이다. 나는 거문도에서 어부처럼 고기를 잡고, 먹고 살아간다. 우스갯소리로 '생계형 낚시'라고도 한다. 아마 나처럼 바닷가에서 어부로 살며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한창훈 작가는 27살 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언가 직업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난해도 볼썽 사납지 않은 직업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예술가'야 말로 가난해도 그리 추하지 않다 싶었다. 사람들은 가난해도 예술가에게는 제법 관대하니까. 그렇다면 예술가를 하되,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건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고심해보니 작가가 적당했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소설가가 적당했다. 그게 내가 세상에 대해 유지해야 할 태도였다"고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다. 여하튼 그는 그렇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어촌의 모든 일은 아침에 가장 왕성하게 돌아간다. 일찍 일어나 물고기를 낚아야 저녁에 밥을 지어 먹으니까. 내 경우, 아침에 눈을 뜬다. 그럼 책상 앞에 앉는다. 나는 책상 앞에서 오전 내내 단어와 글 사이에서 부대낀다. 그럼 내 안의 온도가 올라간다. 그러다 마무리하고 낚시를 간다. 그러면 온도가 내려가면서 떠올랐던 글과 단어들이 싹 사라지고 지워진다. 낚시라는 게 생각을 지우는 행위가 되는 거다." 이러한 패턴으로 에피소드를 썼다. 갈치, 숭어, 문어, 고등어, 군소, 거북손, 톳, 성게, 돌돔 등으로 이어지다 마지막엔 인어로 끝을 맺는다. 해산물당 6~8페이지를 할애하는데, 기본적으로 <자산어보>의 글이 발췌되며 시작된다. 책의 부제도 연재되던 제목을 붙여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다. "손암 정약전 선생이 1814년 쓴 책이 <자산어보>다. 어류학서이고 해양박물지다. 예전 사대부가 귀양을 가면 전부 한양만 바라보고 탄식하며 지내지 않았나. 그런데 손암 선생은 귀양을 가서는 한양을 그리워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곳 매력을 찾아 탐구했다. 바다에 가서 채취하고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그렇게 쓴 것이 <자산어보>인데, 나는 그 시대에 이런 연구서를 만들었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바닷가 일은 천시하던 때에 귀양 간 선배가 해산물을 낚고 채취하고 다녔다는 걸 헤아려보면 얼마나 큰 실천인가. 나는 <자산어보>의 가치를 환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30가지 해산물에 관한 이야기(인어를 포함시켜버리자면)에는 낚시와 채취, 요리법, 그것을 둘러싼 살림살이와 섬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모든 글은 마치 눈으로 보는 듯이 생생하고, 달큰하다. 읽다 보면 울고 웃는다. 가장 힘든 건 밤에 읽자면 배가 고파온다는 거다. 이런 대목이다. '조심스럽게 떼어 내어 50장씩만 묶어놓아도 아주 두툼했다. 자연산 돌김의 진가를 알려면 막 지은 뜨거운 쌀밥과 차갑게 식힌 콩나물국이 필요하다. 뜨거운 밥을 김으로 둥글게 싼 다음 차가운 콩나물국에 적셔 먹는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대류작용을 하듯 차이를 두며 뒤섞이는데 그 접점에서 고소한 맛이 풍겨나온다.(166p)' 이 글을 밤 10시에 읽는다면 누구든 뒤치락거리며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는 바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자산어보>의 가치도 물론이거니와 책을 즐겁게 읽고 독서욕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식욕을 자극 받았다고 했다. 읽다가 회를 뜨러 간 사람도 있고, 읽기 전에 밥을 두 그릇 비우고 배를 든든히 한 다음에서야 읽었다는 사람도 있다. 본의 아니게 식욕만 자극한 모양이다(웃음)." 그의 찰진 문체는 섬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에서, 경험에서 부딪히고 배운 해산물 지식에서, 간간히 들어가는 구수한 농담과 같은 글에서 빛을 발한다. 특히나 책을 읽은 이들의 말처럼 요리에 관해 풀어놓을 때는 얄미울 정도로 맛깔스럽다. 

요지부동일 것 같고, 무척 좁은 ‘섬’이라는 공간. 그는 어릴 적부터 관찰한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책 중간중간 실어 두었다. 가까운 사람도 있고, 건너 들은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묘하게 해산물에 얽혀 때론 코끝이 시큰해지게도 한다. 작가는 “이제 쓸 얘기 다 바닥난 것 같다”는 말을 던졌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거문도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섬은 기본적으로 적막하다. 그래서 육지로 나오면 소음이 귀를 덮친다. 완전한 변방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치면 거문도는 발뒤꿈치나 발톱 정도다. 몸 어느 구석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지만 평소에 신경을 쓰고 살지 않는 정도의 위치인 거다.” 적막하다지만 섬 안에서의 고락을 말할 때 작가는 예외 없이 웃는다. “섬이란 걸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아침에 동네 어르신을 만나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13분쯤 뒤에 또 마주친다. 그러면 참 애매하다. 보통 하루에 같은 사람을 서너 번 마주친다. 술집에 가도 삼삼오오 술을 마시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다 지인이다. 마시다 인사하고 술 잘 마시고 헤어진다. 그러고서 30분쯤 뒤에 보면 또 다른 술집에서 아까 그 사람들이 전과는 다른 그룹으로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거다. 실컷 인사 하고 헤어졌는데, 또 만날 때의 머쓱함. 마을 끝에서 끝까지 5분이나 걸리려나. 거문도는 그런 곳이다.” 그에게 지금 생활은 만족스러운가, 행복한가 물었다. 그는 “그냥 산다”고 답했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라는 말에서 전쟁의 반대말을 붙이자면 ‘평화’보다는 ‘일상’이라는 이야길 했다. “행복은 모르겠다. 비교적 평화롭게, 일상적으로 살고 있다”고. 

바다는 참 신기하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바다에 관해서는 모두 근원적인 그리움을 안고 살고 있다.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모두 바다에 가면 뭔가 해결될 것만 같은 갈망이 있다. 애인과 헤어져도, 밤새 놀다가도,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도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바다는 풀어 헤치는 곳이다. 반대로 산은 맺고, 집중하고, 묶고, 모아지게 한다. 공부해야겠다 마음을 먹으면 본능적으로 산으로 가지 않나. 바다는 풀고 녹이고 흘려 보내게 한다. 상처가 생긴 사람은 바다로 간다. 애인과 헤어지고 등산을 가지는 않는다, 바다로 가지. 바다는 그런 곳이다. 역할이 있고 힘이 있다." 또 바다는 화해가 쉬운 곳이라고 했다. 배를 타고 있으면, 푸른 한 일자를 노려보고 있으면 절로 화해한다고.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그렇게 인자한 바다의 기운이 담겨 있다. 그가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전하고픈 말을 적는다. “나는 이 책에 바다에 관한 나의 모든 지식을 담았다. 이 책을 통해서나마 사람들이 바다와 더 친숙해졌으면 좋겠다. 바다에 가자고 해놓고는, 힘들게 가서 좀 걷다 횟집에 들어가는 코스는 너무 불행하지 않나. 그러지 말고 갯바위에서 거북손을 캐서 물 조금 넣고 끓여 먹어보는 재미를 느껴보면 좋겠다. 이것저것 해보고, 뭔가를 해 먹는 거. 게다가 요리라는 건 최고의 휴머니즘 아니겠나. 아빠가 가족들을 위해 뭔가 만들어주는 거, 아이들이 바다에 추억을 갖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만든 걸 맛있게 먹어주는 것. 그만한 것이 어디 있겠나. 그게 최고다” 

 

#책 소개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한창훈 지음 문학동네 

200년 전 흑산도 바다에서 손암 정약전 선생이 쓴 어류학서 <자산어보>를 그가 사는 거문도에 연결했다. <자산어보>의 뜻을 바탕으로 30종의 해산물과 에피소드를 사람살이와 낚시와 채취, 요리 등과 버무렸다. 그러자 소박하고 구체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각자 뚜렷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책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큰 물고기를 낚았다. 또는 놓치고 말았거나 입질도 못 받았다. 이런 것만 기억한다면 우리 마음 속의 바다는 인공낚시터 물칸처럼 초라해지고 맙니다. 우리가 아주 기가 막힌 하루를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가 이야기하는 건 비단 해산물에 관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editor Chae Jung Sun

photographer Kim Min Kwan  

cooperation THE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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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LLERIA> 10월호

 

 

고암 이응노를 기념한다

조성룡 건축가가 고암 이응노 기념관을 설계했다. 그는 땅에 건물을 올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풍경으로 치환하는 건축가다. 질곡 많은 이응노의 생애를 생각하며 건축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함께 홍성 고암 이응노 기념관에 다녀왔다.    

 

 

나무가 사라졌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수변에 심어 둔 버드나무 한 그루가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유난히 멋진 나무들만 골라 넘어졌네”라고 하는 조성룡 건축가를 따라 뒷산을 오르고 연못을 둘러보는 중. 뒷산과 수변 나무 몇 그루가 사라졌지만 기념관은 고적하기만 하다. 조성룡 건축가는 지난 2008년부터 고암 이응노 기념관의 설계를 시작했다. 설계를 진행하는 중, 예산과 홍성 간에 이견도 있었고, 작품이 전시되어 개관하기 전까지 어려움이 잔존해 있지마는 기념관은 태풍에도 불구하고 평화롭다. 이응노 기념관은 홍성에서 수덕사 방면 커브를 지나치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이때, 딴 생각이라도 하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너무 호젓하게 단층으로 땅 위에 앉아 있는데, 그게 화려하지도 않거니와 너무 얌전해서 산과 들에 묻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소마 미술관이나 의재 미술관은 편하지 않은 구조였다. 그러나 이곳은 무척 편안했다. 그래서 땅 위에 앉히기 쉬웠다. 차를 타고 찾아오려는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다. 그만큼 땅을 거스르지도 않았고, 유린하지도 않았다.”

 

조성롱 건축가는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기념관을 지었다. 그는 그간 수많은 설계를 해 왔는데, 의재 미술관, 소마 미술관, 선유도 공원, 지앤 아트 스페이스가 등이 있다. 그의 의재 미술관은 20세기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2001년에 문을 열었다. 이 미술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종규 교수와 공동으로 설계했는데, 의재 선생의 작품과 무등산을 조화롭게 건축물에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고 ‘한국건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의재 미술관은 힘이 있는 땅이다. 그가 30년 동안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니까. 많은 이야기와 풍경이 있는 자리 아니겠는가. 그 많은 흔적들이 있으니 집은 그곳에서 공생을 하기만 하면 된다. 집은 본디 돋보이게 하려는 것부터가 말썽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응노 기념관을 언급한다 “저기 용봉산이 있다. 이응노가 땅의 정기를 받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용봉산은 남자, 월산은 여자라고 했다. 그가 놀던 이곳을 기억하며 이응노 기념관은 땅과 자연을 가지고 만들었다. 보면, 그가 태어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예로, 농사일에 기계가 들어오면서 땅이 직선으로 구획되지 않았나. 나는 1950년대 지도 한장을 어렵게 구했다. 그리고는 부러 그때와 동일하게 땅을 구부려 놓았다.” 그래서 이응노 기념관으로 들고 나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작은 다리가 얹혀진 개울도 구불구불하고, 포장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길도 죄 구부러져 들어온다. 

 

그가 아이패드를 꺼내 설계를 보여주었다. 구부러진 땅이 있는 오래된 지도가 있고, 흩뿌려진 큐브와 같은 기념관의 전체 모습이 내려다 보인다. “홍성군에서 매우 넓은 땅을 주었다. 죄 논이었다. 대지가 넓고 땅은 편안했다. 이전 의재 미술관은 이처럼 넓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 형태를 꼬아 용적률을 높인 거였다. 소마미술관은 조각공원이었다. 넓다. 그래서 마치 벌레, 동물이 땅 위에 올라 앉아 긴 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해자도 십자로 뻗어가게 했다. 대지가 넓어 단층으로 했고. 다시 이응노 기념관을 얘기하자면, 이 넓은 땅은 죄 논이었다. 이 너른 논에 있는 벼를 없애고 연 밭을 만들었다. 지금은 없지만 버드나무도 심었었다.” 

 

그가 만든 연 밭은 부레옥잠과 함께 아직도 연꽃이 만발했다. 겨울이 오면서 부레옥잠이 조금 거둬질 때면, 그 연 밭에 용봉산 물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이다. 이것도 모두 조성룡 건축가의 의도였다. 이응노 기념관은 뛰어다니기 좋다. 마치 시골 할머니 댁의 너른 마당 같기도 하다. 그만큼 편안한 기운이 감돈다. 주위엔 낮은 집과 적당한 산, 시끄럽지 않은 2차선 도로조차 멀리 있다. 절로 걷고 싶고, 뛰고 싶다. 건축가는 “반나절만 머물다 가도 좋겠다”라고 했지만, 이곳은 추억을 담기에 좋은 장소로 자라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루 종일, 용봉산의 색깔 변주를 보고 있는대도 좋을 것이다. 

이쯤해서 고암 이응노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의 기념관을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의 미술을 이해하면 그의 성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생애를 보면 그가 아이였을 시절이 보고 싶어질 것이다. 고암은 이곳, 한적한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다. 지금 기념관이 위치한 자리, 양쪽에 월산과 용불산이란 돌산이 보이는 집이다. 이것에 관해서라면 그가 훗날 개인전 카탈로그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주위에는 아주 알맞은 크기의 산들이 있었는데, 어린 나로서는 그것이 실제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다. 산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고 나에게는 아주 많은 것을 속삭여 주었다. 우리는 산봉우리 하나하나를 다 이름 붙여 불렀다. 부엉이봉우리, 공주봉우리, 까까중봉우리, 거울봉우리 등등. 그저 겉모양에 따라 붙인 것이지만 모든 바위들이 사랑스런 몸체로 느껴졌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늙은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 바위들은 언제나 함께 있다.’ 

 

조성룡 선생님은 생가 자리에 지어진 초가집에 앉아 이응노가 뛰어 다녔을 용봉산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시시각각 색이 달라진다”고. 고암 이응노 역시 살았을 때 다채로운 돌산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이응노는 이런 곳에서 17살이 될 때까지 자랐다. 늘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고 한다. 땅바닥, 벽, 싸인 눈 위에, 볕에 그을린 살갗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놀이가 그에게는 훗날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작품을 표현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주었다(그가 옥중에 신문과 밥알을 모아 오브제를 만들었던 것이 그렇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후 가출해 해강 김규진 선생 밑으로 들어가 서생으로 지내다 이후 간판집을 꾸렸다고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일을 하면서, 7년 동안 대나무 그림을 조선미술전에 출품해 온 그는 번번히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쳐 대밭이 술렁이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날 물결치듯 술렁이는 대나무 광경이 깊게 남아 단숨에 석 장을 그려낸 그는 그 중 한장을 전람회에 출품했다. 그것이 특선을 했고, 본격적으로 미술 작가로 등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의미 깊은 대나무는 홍성 기념관 주변에도 심어져 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나 있는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서른 네 살에 경성을 떠나 도쿄로 간 이응노는 그곳에서 마쓰바야시 게이게쓰 선생을 만나 사사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절 수덕사에 들어간다. 아예 사들이게 되는데, 그 숙박업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덕여관’이다. 이곳 수덕여관에 관해서라면 나혜석, 김일엽이 머물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민 생활을 관찰하는 작가였다. 1955년에 그린 <취야(醉夜)>와 1954년에 그린 <영차영차>가 대표적이다.서<취야>는 밤시장 풍경에 더해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의 생활이 묻어나고, <영차영차>는 노동자들이 힘을 합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해 그렸다. 자포자기하던 시절, 그는 이러한 서민의 모습을 통해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즈음 고암은 파리로 간다. 그리고 1967년에 아들이 북녘 땅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봉을 목적으로 동베를린에 방문했다가 동베를린 공작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형무소 마당에서 주운 못으로 세면 도구나 식기에 구멍을 내어 조각을 했고, 간장과 화장지로, 밥알과 신문지로 그림과 오브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감옥 밖에서보다 더 많이,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훗날 소회했다. 감옥에서 풀려나 1969년에 파리로 다시 돌아온 이응노 1970년대 ‘극동 출신의 독특하고 탁월한 현대작가’로 호평을 받으며 문자 추상 작업에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이즈음 다시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음모 사건’에 관계되었다는 의혹으로 13년 간 입국하지 못하게 된다. 그간 고암은 광주민중에 호응해 추상화에서 구상화로 예술 세계를 이동하였고, 그 뒤 국내에서 전시 오픈 준비가 한창이던 1989년, 85세가 되는 생일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고암 이응노의 생애에 불미스러운 이데올로기 사건이 끼어든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단지 가장 민족적인 작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과 현대화에 있어 창조적인 작가였고, 시대상황과 민족의식을 창작 세계의 원천과 합일시키기 위해 노력한 작가다. 이응노는 말했다. “저는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야 살 길이 있으며 통일을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발벗고 나설 용의가 있습니다. 예술이란 뿌리 찾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란 사람이 만든 제약일 뿐이지요. 이데올로기에 부딪치다 보면 끝내는 한계에 부딪히거든요.” 

또한 그는 <서울-파리-도쿄>를 통해 “나에게는 권력 있는 사람보다는 약한 사람들, 모여서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쪽에 마음이 쏠리고, 그들 속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곤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성룡 건축가의 말대로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미술관과 수덕여관 외에 그의 생가에 만들어진 이 기념관이 의미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현대사적으로도 중요한 개인의 일대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 독일이 2차 대전 이후 ‘기념한다’는 것에 관해 고민했던 것처럼, 그리하여 시간이 가면 기억이 달라진다는 걸 역설하는 <사라지는 탑>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기념하고 되새기는 것에 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조성룡 소장은 에디터에게 <고암 이응노, 삶과 예술>이란 책을 내밀었다. 제법 두툼한 이 책은 고암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해 놓은 책이다. 책을 펴니 곳곳에 줄이 그어져 있다. 이응노와 그의 부인인 화가 박인경의 대담을 일본인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가 펴낸 책 <서울-파리-도쿄>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그림과 민족을 둘러싼 대화’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에코는 이응노의 근작들을 보면서 “선생은 소년시절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라고 했다는 부분. 그리고 그가 파리 아틀리에에서 붓을 쥘 때면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고향 홍성의 월산, 용봉산에 머물곤 했다는 부분. 건축가는 이응노를 느꼈을 것이다. 건축물 전체와 곳곳에, 고암 이응노와 조성룡 건축가의 뜻이 묻어 있다.   

현재는 건축물 내부에 작품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황. 한창 전시에 대한 고민이 많은 와중이다. 고암 이응노 기념관은 12월경이면 작품을 설치하고 2011년 3월경이면 관람객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때 조성룡 소장은 기차를 타고 오라고 권유했다. 장항선을 타고 내려온다면 앞모리밖에 볼 수 없는 용봉산 줄기를 한참 동안이나 볼 수 있다고. 이 유려한 돌산의 긴 허리를 10분 가까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날도 그는 홀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먼저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붓을 쥘 때마다 용봉산과 월산에 뛰어 놀고 있었다”는 고암의 고백과 “시시각각 용봉산의 색깔 변주가 기가 막히다”던 조성룡 소장의 말이 꽤 어울리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Editor Chae Jung sun

Photographer Ki Sung Y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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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LLERIA> 12월호

 

 

디자인과 롱 라이프 디자인 

얼마 전, 나가오카 겐메이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강의를 하고 돌아갔다. 이것 역시 디자인의 확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그간 그의 일군 행보 때문이었을까. 그의 롱 라이프 디자인을 다시금 조명한다. 디자인이란, 이런 것이다.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나오토 후카사와(Naoto Fukasawa)와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이 큐레이팅한 <슈퍼 노멀(Supernormal)>이란 전시가 있다. 이 전시는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어 국내에는 지난 2009년에 소개되었다. 이름 그대로 '평범함 속에 숨겨진 디자인'이란 의미가 슈퍼 노멀이다. 디자인이란 비싸거나 혹은 현대적이며 희귀한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에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전시이자 책이었다. 비슷한 개념의 디자인 전시로는 모마의 <디자인, 일상의 경이>가 있었다. 많은 디자인 담론과 디자인 축제들이 있지만, 사실 디자인에 대한 충실한, 간단하고 새로운 이야말로 '일상에 경이'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면, 디 앤 디파트먼트(D & Department) 도 마찬가지다.  

 

나가오카 겐메이란 이가 있다. 스스로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라고 하는 디자이너다. 1965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일본디자인센터 하라디자인연구실에 있다가 디자인 사무실 ‘드로잉 앤드 매뉴얼(Drawing and Manual)’을 설립했다. 주로 컨설팅에 관한 일이었다. 이즈음 그는 동네 재활용가게를 돌아다니면서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을 사서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쌓인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가게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하길, ‘디자이너가 재활용 가게를 여는 건 어떤 것일까’ 싶었단다. 그것이 2000년, ‘디 앤 디파트먼트 프로젝트(D & Department Project)’의 시작이다. 이 재활용 가게는 새로운 디자인을 생각하는 출발점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는 디자인’ '오랜 시간이 지나도 우리들 곁에 남아 있는 디자인' 혹은 ‘지금 우리들 곁에 남아 있는 익숙한 디자인을 찾아내 돌보는’ 것이라고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이다. 

 

도쿄 세타가야에 있는 그의 디 앤 디파트먼트 도쿄는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1층 카페에서 식사와 차를 마시기 위해서나, 나가오카 겐메이가 선별한 제품들을 쇼핑하기 위해서가 대부분이겠지만 또 많은 이들이 그의 비즈니스를 목도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한다. 디자인을 고민하게 하는 선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디 앤 디파트먼트를 지금까지 도쿄에 이어 오사카, 시즈오카, 삿포로에 확산시킨 것도 물론이지만, 2002년에는 ‘60비전(60Vision)’을 시작했다. 1960년대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와 재생산하는 것이다. 가리모쿠 가구가 시작이었고, 지금은 노리다케, 문스타 등의 브랜드들이 있다. 국내에서는 가구숍 인디테일에서 가리모쿠를 소개하고 있다. 또 60VISION과 유사하지만 보다 캐주얼한 감각의 셀렉트 라인인 ‘니폰 비전(Nippon Vision)’이 있고, 일본 지역 상품들을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지역 간 가교 역할을 하는 ‘니폰 프로젝트(Nippon Project)’도 있다. 또한 폐자재를 이용해 새로운 가구를 만드는 ‘샘플링 가구(Sampling Furniture)’도 있다. 

 

아이디어는 넘쳐난다. 한번 사용하고 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십상인 쇼핑백에 디 앤 디파트먼트 로고가 들어간 포장 테이프를 한번 두르는 것으로 그들만의 쇼핑백이 된다. 실제 매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쇼핑백이다. 그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이너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디자이너다. 2005년에는 격월간지 <d long life design>을 창간하기도 했고,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 <디자인 생각 위를 걷다>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 <디자인 함께하며 걷다>를 출간했다. 읽어 보면, 디자인 관련 비즈니스와 디자인 본연에 관한 자잘한 그의 고민들이 담겨 있다. 그의 디자인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고, 우리의 장바구니를 한번 들여다보고, 방안을 둘러보자.    

 

cooperation INDETAIL 542-0244, D & DEPARTMENT http://www.d-department.com/jp/ 

 
 
 

<THE GALLERIA>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이스탄불에서 오르한 파묵을 만났다. 꿈이었어도 좋았다.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돌아와 책을 펴고 입으로 조용히 읊조려보는 그의 이름, 오르한 파묵, 이스탄불, 케말, 퓌순. 그러면 늘 벅차 오르곤 한다.  

 

오르한 파묵을 만나러 가다 

첫 페이지를 연다. 그 말을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또 읽고, 책을 열 때 또 다시 이 글귀를 찾아 읽는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게 전개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더라면, 절대로, 그 행복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평온으로 내 온몸을 감쌌던 그 멋진 황금의 순간은 어쩌면 몇 초 정도 지속되었지만, 그 행복이 몇 시간처럼, 몇 년처럼 느껴졌다.’ 1장,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의 시작이다. 

 

<순수 박물관>은 2006년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유난히 조바심 나던 그의 신간이었다. 신간을 받아 들고, 이 첫 번 페이지를 읽고 난 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을 마음껏 상상했었다. 첫 페이지, 첫 번째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였을까. 그의 역자 이난아는 오르한 파묵을 말할 때 ‘바늘로 우물을 판다’고 집필 과정을 비유 했다. 말 그대로 ‘바늘로 우물을 파듯’ 일반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초인적 인내력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거였다. 그의 책상엔 이런 메모가 있다. ‘자리에서 절대 일어나지 말고, 쉬지 말고 써, 자리에서, 책상에서, 절대 일어나지 마!’ 옮긴이의 말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난아 역자는 그 메모를 읽고 소름이 끼쳤다고 했다. 돌을 깎듯이 넘어가 한 페이지, 그는 10여 년에 걸쳐 <순수 박물관>을 썼다. 그가 종이 한 장을 메우기 위해 얼마나 깊고 긴 고독을 감내했을 지 우린 감히 짐작하지도 말자. 

 

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 작가로 알려져 있고, 국내에 <내 이름은 빨강> <눈> <검은책> 등의 저서가 소개되어 있다. 기쁘게도 오르한 파묵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했다. 역자 이난아에 의하면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이전, 일본보다 앞서 한국에 소개된 그의 책들을 한국 독자들이 읽어주었고, 좋아해주었고, 무엇보다 이해해주었기 때문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역자가 쉼표를 하나 넣는 게 어떠냐 묻자, 한국 독자들은 모두 이해할 거야 라고 갈음했다는 말도 있다.   

 

<순수 박물관>은 이난아 역자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 꽤 집착 강한 사랑 이야기다. “한 여자(퓌순)을 평생 사랑한 한 남자(케말)가 그녀의 집에서 물건을 홈쳐 와, 전에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 보관하고, 나중에는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운다는, 상당히 집착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것은 이미 몇 년 전에 파묵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옮긴이의 말에 있는 글귀다. 책 뒷 커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이라고. 집착이란 말은 너무 강해서 이 책을 설명할 때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가 4213개의 담배 꽁초를 모았고, 집착이라 바꿔도 좋을 사랑이었다. 그것을 바꿔 ‘불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속 케말이 그러했듯, 소설 속 오르한 파묵이 그랬듯, 소설 밖 저자 오르한 파묵은 실제 순수 박물관을 만들고 있었다. 소설 속내용이 실제화되어 박물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자리를 찾고, 건물을 샀고, 전시할 물건들을 하나하나 직접 모았다는 그를 만나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로 향했다. 이난아 역자와 함께 ‘오르한 파묵 읽기’란 북클럽을 수강했던 이들 몇몇과 민음사, 방송사 기자가 함께 한 여정이었다. 아주 드물게 아니, 처음으로 오르한 파묵은 그를 찾아오는 한국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기쁘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의 책 <순수 박물관>의 실제 ‘순수 박물관’을 최초로 공개해 주겠다고도 약속했다. 이런 약속으로 달뜬 여정은 11시간이 무색했다.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경. 이스탄불은 먼저 다소 흥분한 여행객들의 눈을 선선한 바람으로 씻어 주었고, 옮겨 탄 버스는 보스포루스를 창에 담았다.  

 

       

터키, 이스탄불, 순수 박물관 

터키는 과거 히타이트, 로마, 비잔틴, 오스만 대제국이 번성했던 문명의 발상지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재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접하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동서양이 충돌했고, 공존하는 곳이다. 이중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위치해 있다. 3대 강국 로마, 비잔틴, 오스만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곳으로 국내에 여행지로 소개되고 부상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이곳에서 케말과 퓌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은 스탄불 곳곳에서 만나고, 동떨어져 괴로워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본다. 만일 <순수 박물관>을 읽는다면, 터키의 여정에서 당장이라도 케말과 퓌순이 나타날 것만 같은 그 기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떨리는 마음을 안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둘러 보았다. 보스포루스는 터키어로 ‘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하얀 성> <눈> <이스탄불> 등의 모든 소설에는 보스포루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순수 박물관>에서도 자주 언급되는데, 특히 8년 만에 처음으로 퓌순과 케말이 단 둘이 식사를 한 날에도 언급된다. 이날 바람 불고 파도 치는 보스포루스 물을 바라보며 퓌순이 “수영복을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번에 그녀는 꽃무늬 옷 안에 푸른색 비키니를 입었다. 그리고 퓌순이 파도에 흔들릴 때 케말을 붙잡으며 팔을 목과 어깨에 감은 일련의 ‘포옹’을 하던 신이 있다. 떨리는 접촉에서 거세고 차가운 바다에 빠진 케말의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대목으로 말 그대로 ‘하해와 같은’ 사랑이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물살을 보고, 그들처럼 뛰어들지는 못했으나 그곳에서 배를 타 보았다. 많은 이스탄불 사람들이 캐러멜 같은 피부를 드러내며 수영과 낮잠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곳 뒤로 난 자동차 도로들. 케말 역시 케스킨 씨네를 방문하고 퓌순과 눈을 마주치고 저녁식사와 대화를 나눈 뒤 겨울 저녁에도 자동차를 타고 보스포루스로 외출을 했을 때 지나던 거리였을 것이다. 

 

오후 6시경 추크루주마로 향했다. 추크르주마는 소설 속 퓌순이 살던 집이 있는 곳이다. 케말이 사들인 집, 오르한 파묵이 사들인 집. 그곳이 ‘순수 박물관’이다. 역자 이난아는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어떤 색의 페인트를 칠할까 고민하던 중이라 군데군데 여러 색의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고 했었다. 막 골목을 돌아 들어갔을 때,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경탄하며, 순수 박물관을 손으로 가리키며, 가슴이 뛰었다. 자줏빛이 도는 진한 갈색 벽. 깨끗한 창문이 달린 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수박물관을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 보았고, 외국인들을 발견한 주민들이 베란다에 나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르한 파묵은 순수 박물관 옆 언덕배기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했다. 한국 취재진, 터키 소속 취재진들이 이 순수 박물관과 한국 방문객들을 촬영하고 있었고, 순간순간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문득 누군가의 벅차고 낮은 환호성. 오르한 파묵이 파란색 셔츠를 입고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케말이었을까? 저자를 만났지만, 소설 속 케말을 만난 듯 두근거렸다. 그가 세계 최고의 작가인 것도 순간 망각한 채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답하는 것도 잊었다. 큰 키, 정갈한 말투와 매무새는 ‘이스탄불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끊임 없이 다시 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꾸만 “사랑은 교통사고다”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대답했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오르한 파묵은 먼저 한국 방문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함께 순수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순수 박물관은 이쯤 하면 그의 작품들이 들어가 있을 것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르한 파묵이 최근 미국을 오가고, 순수 박물관의 공사가 지연되었으며 그의 수집품(아마도 한 가지라 들었다)이 다 모아지지 않은 관계로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상상케 했다. “이곳은 이들이 함께 잠을 자던 침대를 놓아 둘 겁니다.” 그가 2층에 올라가 한쪽 벽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었다. 아래는 그가 우리에게 순수 박물관을 설명한 대략의 녹취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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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문을 닫아 주세요. 시끄럽지 않도록. 이렇게 순수박물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1시간을 비행하며 인내해 준 것도 감사하고요. 안타깝지만 아직 박물관이 완공된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것들을 설명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순수 박물관>을 읽어서 알겠지만 이곳은 순수박물관의 박물관이기도 하고 소설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나는 12년 전, 이 집을 샀었는데요, 그때는 소설을 내는 시점에 동시에 박물관을 개장하고 싶었습니다. 안타깝지만 성공하진 못했네요. 참고로 한국에서는 최근에 출간되었지만, 터키에서 <순수 박물관>이 나온 건 은 약 2년 전입니다. 

먼저 건물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소설을 읽어 알겠지만 이 곳은 츠쿠르즈마 대로가 지나는 곳에 있습니다. 퓌순이 사는 집은 윗층이죠. 1층엔 퓌순의 친구였던 이가 살던 곳입니다. 알겠지만 소설이 끝날 즈음에 케말이란 이가 이 건물을 사서 박물관으로 만들잖아요? 소설에서도 케말이 박물관을 완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소설 속에 나는 케말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출입구를 가리키며) 서문에 쓰여진 글귀는 출입구 쪽에 쓸 예정입니다. 지하실로 통하는 길을 내려가면 여타 소품을 파는 곳이 나오게 될 것이고요. 저 쪽에는 퓌순이 피우는 담배(약 4천 2백 4개피)를 일일이 핀으로 꽂아 전시할 예정입니다. 참, 입구에 경비가 서 있을 예정인데 그가 책 안에 들어가는 입장권에 도장을 찍어 줄 겁니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전시 물품은 ‘퓌순의 귀걸이’입니다. 하얀 상자에 담겨 전시할 겁니다.

(2층으로 올라갔다)진정한 전시장은 2층입니다. 책은 총 83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80장까지 각각의 상자 속에 담아 보여줄 예정입니다. 상자 대부분은 다 완성했습니다. 조만간 이쪽으로 옮겨 올 예정인데, 아시겠지만 미국에 강의하러 다니는지라 시간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어 완공 후에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 이 상자들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보면 구절이 떠오를 것이고, 또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비상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케말이 이 집을 사서 죽을 때까지 지냅니다. 그가 머무는 방이 이 꼭대기 방입니다. 아마도 저쪽에 케말의 침대가 놓여 있을 것이고, 그 침대는 퓌순과 사랑을 나누었던 침대가 될 겁니다. 물건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을 건데, 아마도 세발 자전거는 놓여 있을 것이고요. 소설에서 보면 나도 케말을 만나러 이 방에 들어오곤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진짜 있었던 일인지, 꾸며낸 일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구조는 윗층에서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순수박물관 원고를 두고 넘겨볼 수 있게 할 예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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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쿠르주마, 그의 아틀리에 

오르한 파묵은 우리를 아틀리에로 인도했다. 동양인과 함께 걸어가는 오르한 파묵(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이곳에서 유명 인사여서 누구에게나 물어도 그를 알고 있다)가는 길에 어느 주민이 그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하기도 했다. 같은 추크르주마에 위치해 있는 그의 아틀리에는 느리게 걸어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마주보는 건물 두 곳에서 ‘순수 박물관’에 들어갈 작품들을 구상하고 만들고 있었다. 두 명의 큐레이터, 스태프들과 함께 한 작업들이었다. 

빙 도는 계단을 지나 큐레이터의 인도 아래 아틀리에에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퓌순의 꽃무늬 원피스였다. 아마도 그녀가 운전 연습을 하던 첫 날에 입은 것이 아니었을까. 주홍빛이 도는 꽃무늬에 이파리가 달려 있는 원피스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원피스를 보며, 우리는 조용히 퓌순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또 가장 눈에 띄는 건 그가 하나씩 훔쳐온 개 인형이었다. 알다시피 케말은 퓌순의 집에 드나들면서 TV에 놓인 인형을 훔쳐오곤 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퓌순의 담배, 담배에는 날짜와 함께 일일이 간략한 그날의 이슈, 상념들이 적혀 있었다. 또한 멜템 사이다나 레몬 영화사 사진, 퓌순과 케말이 함께 먹었을 프로피테놀(다음날 베이오울루 ‘인지’ 가게에 들어가 이것을 맛보았다)의 모형이 놓여져 있기도 했다. 이것들은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각각 커다란 상자 안에 미술 작품처럼 구성되어 담겨 있다. 설치된 작품 가운데는 담배를 피우는 퓌순의 손이 상영되는 영상 설치물도 있다.   

아틀리에에서 작품을 보면, 그가 오르한 파묵이었다는 생각에 무릎을 한번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그의 순수 박물관을 연상했을 때 연상하던 박물관의 모습은 그저 그가 모아둔 낱개의 작품들이 전시되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작품을 쓸 때 그랬듯이, 무척 치밀하게 마치 케말의 전 인생을 옆에서 함께 한 사람처럼 모든 개인의 역사를 이곳에 옮겨놓고 있었다. 작품은 입체적이었고 그래서 케말과 퓌순은 실존 인물처럼 우리 앞에 도드라졌다. 

그의 맞은편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 불 꺼진 방에 홀로 들어가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상자에 ‘Orhan Painting’이라고 붙어진 메모지와 퓌순으로 생각되는 흑백 사진들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세발 자전거와 퓌순이 즐겨 그렸을 새 박제와 지우개까지, 정말 온갖 것이 다 모여 있었다. 12년 전, 처음 순수 박물관을 생각하고 집을 구입했을 때 오르한 파묵은 지금의 소란한 방문객들을, 아마도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박물관에 들어섰을 이 동양인들을 생각이나 했을까. ‘유난히 친절했다’는 이난아 번역가의 말처럼 그는 시종 친절했고, 모두와 일일이 사진 촬영에 함께 해 주었다. 때론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사인에 그림도 그려 넣어 주었다. 기념으로 받은 그의 사인은 현재 <순수 박물관> 2권이 시작되는 즈음에 담겨 있다. 갸웃할 일이다. 케말은 오르한 파묵일까, 오르한 파묵은 그저 오르한 파묵인가, 그의 사적 역사가 가장 많이 드러난다는 <순수 박물관>을 읽으며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며 시종 고개가 갸웃한 하루였다.       

<순수 박물관>에는 1회 입장권이 들어 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을 출간하기 전에 그의 책을 출판하는 민음사측에 이 입장권을 포함시킬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책 2권에는 실제로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다. 언젠가 이 입장권을 가지고 완성된 <순수 박물관>에 가 보리라. 케말이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었을 하늘이 보이는 꼭대기 방에 올라가 그 하늘을 다시 보고 싶다.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리라.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공지 *2005~2017년 포트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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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4년 : <매일경제> <한살림>
9 2013년 : <매일경제>
8 2012년 : <아시아경제>
7 2011년 :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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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06년 : <AFEW>
1 2005년 : <FEATURE>